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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雜說/테마사

Sun, 스캇 맥닐리 그리고 Java

Dohwasa 2010. 10. 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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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후반은 실리콘 밸리라 불리는 곳이 막 창업자들의 중심지로 도약하던 시기였다. 애플의 두 창립자 스티븐 잡스와 스티븐 워즈니악은 창고에서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 애플 I을 만들었고,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발명했다.
 Sun의 창립자 비노드 코슬러, 그는 인도 사람이었다. 인도의 뉴델리에서 10대때 이미 자신의 회사를 차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인도공과대학에서 전자공학 학위를 취득한 후 인도에서 한 차례 창업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피츠버그의 카네기멜론대에서 생의학공학 석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의 스탠포드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코슬러는 1980년 스탠포드 대를 졸업하고, 컴퓨터 지원 설계(CAD)를 특화한 데이지 시스템즈의 창립에 참여했다. 데이지에서 보낸 1년 반은 비노드 코슬러에게 Sun을 창업하기 위한 영감을 준 중요한 시기였다. 당시 CAD를 다루기 위해서는 엔지니어들이 큰 미니컴퓨터를 교대로 사용하곤 했는데, CAD나 컴퓨터 지원제조(CAM)를 다루기 위한 미니컴퓨터의 대안으로 코슬러는 퍼스널 컴퓨터로 새로 개발된 워크스테이션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스탠포드대에서 보았던 컴퓨터를 전자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이더넷(Ethernet)이라는 네트워크와 같은 형태로 워크스테이션을 연결시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는데, 당시로서 이런 발상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일반화된 병렬처리, 네트워크화를 이미 1980년에 코슬러는 구상했던 것이다.
 1981년, Sun의 창립 주역 5인 중 2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스탠포드대 네트워크, 약칭 Sun으로 불리는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던 한 대학원생 앤디 벡톨샤임이 코슬러의 사무실을 찾아왔던 것이다. 코슬러는 벡톨샤임이 그가 구상한 워크스테이션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와 함께 워크스테이션을 개발하고 판매할 방법을 담은 6페이지짜리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다. 봅 삭크만과 덕 브로일스라는 두 투자가에게서 사업설명회 후 5일만에 28만 4천달러의 투자를 이끌어 낼 수 있었고, 코슬러와 벡톨샤임은 자본금을 확보하자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코슬러가 동업자로 처음으로 생각해 낸 사람은 스탠포드대 동창생으로 산호세의 오닉스 시스템에서 근무하고 있던 스캇 맥닐리였다. 아메리칸 모터스의 중역으로 근무하던 아버지를 가진 맥닐리는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한 상류층 인간이었고, 하버드대와 스탠포드대를 다녔지만 학문적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상류층에서의 성장과정과는 달리 대학시절 파티광이라는 달갑지 못한듯한 같은 명성을 떨치고, 오늘날에도 자신의 전공을 ‘맥주와 골프’라고 하는 등 성장과정과는 무관하게 생성된 인간적인 매력이 상당했다. 이빨을 드러내고 활짝 웃는 미소와 겸손한 태도, 단정한 용모 덕분에 맥닐리는 대학시절 동료들의 우상이었다. 결국 스캇 맥닐리는 Sun의 공동창업자이자 제조담당 부사장이 되었다.
 코슬러, 벡톨샤임, 맥닐리의 3인방은 Sun의 최초의 제품 Sun-1 워크스테이션 개발을 위해 3개월동안 미친 듯이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운영체제로 사용하고 있었던 유닉스 시스템에 대해 불만을 가졌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주립대 대학원 과정에 재학중이던 유닉스 전문가 빌 조이를 영입하게 된다. 야망과 비전을 가진 코슬러, 실용적인 제조기술과 대인능력이 탁월한 맥닐리, 뛰어난 하드웨어 기술을 가진 벡톨샤임, 유닉스의 전문가 빌 조이. 이 4인방에 의해 드디어 본격적인 Sun이 출범했다. 여기에 빌 조이의 버클리대 동창생 존 게이지를 마케팅과 판매 담당으로 영입하면서 Sun은 본격적으로 워크스테이션 시장에 나서기 시작했다. 초창기 Sun의 기본운영개념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긴축적이고 인색한 운영, 제품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기능은 상황에 따라 임시로 대처하는 것, 맥닐리가 종업원들을 상대하고 사기 진작 문제를 다룬다는 이 세가지로 압축되었고, 이는 후일 코슬러가 회사를 떠날때까지 유지된다.   
 1984년이 지나면서 Sun의 임직원들은 CEO인 코슬러의 능력 이상으로 Sun이 성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원활한 운영을 위해 새로운 사장으로 영입한 오웬 브라운은 코슬러와의 10개월에 걸친 주도권 다툼 끝에 사직하게 되지만, 이를 계기로 코슬러가 과연 CEO 자리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Sun 내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브라운의 사임 이후 제조담당 부사장이었던 스캇 맥닐리가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창업 초기에는 비노드 코슬러의 높은 이상과 비전은 Sun에 잘 들어맞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Sun의 성장과 함께 코슬러의 문제점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세심하고 꼼꼼한데다 중간관리층을 무시하고 생산라인으로 직접 달려가 변화를 요구하는 등 코슬러는 차차 Sun과 맞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초기 투자자였던 봅 삭크만, 덕 브로일스를 포함하는 사외이사진과 빌 조이 등 Sun의 주축 멤버들은 코슬러를 대신하여 맥닐리가 CEO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기 CEO로 지목된 당사자 맥닐리는 코슬러와 막역한 친구사이인데다 항상 코슬러에게 충실했기에 자신을 CEO 후보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브라운과 코슬러의 주도권 다툼에서 코슬러 편을 들었던 맥닐리도 시간이 지나면서 역시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결국 이스트만 코닥과의 투자협상을 계기로 코슬러는 1984년 가을, CEO직을 사임했다. 당시 이스트만 코닥은 Sun의 내부분열 상황을 우려하여 투자를 미루려 했으나, Sun의 이사회가 맥닐리를 새 CEO로 선임했다는 통보를 받고 나서 2천만 달러의 투자 계획을 결정했다.  
 스캇 맥닐리의 성공전략을 언급할 때, 늘 거론되는 것은 그가 자동차 업체의 간부인 아버지를 따라서 고교시절을 보낸 디트로이트에서의 아이스하키 선수 경력이다. 일렉트로글라스의 커트 워즈니에커 회장은 “맥닐리는 아이스하키를 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해왔다. 재빠른 몸놀림, 교묘한 측면돌파, 호쾌한 슈팅, 보디체크를 하고 난 후 큰소리로 싸울 줄 아는 능력이 모두 하키를 통해 얻은 노하우”라고 말했다. 큰소리로 싸울 줄 아는 능력은 반 MS진영의 수장으로서 MS 진영에 대해 퍼붓는 그의 독설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를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어록에서는 그의 생각과 성향을 읽을 수 있다. “동의하면 전념하라, 동의하지 않아도 전념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가라.”라는 말은 “네트워크가 컴퓨터다.”라는 말 만큼 Sun에 있어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말이다. 친구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한 맥닐리의 이면에는 무자비할 정도의 확고한 의지와 날카로운 사업 감각이 숨어있고, 래리 엘리슨처럼 그 역시 자신의 판단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이 이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최선의 결정은 올바른 결정이다. 차선의 결정은 틀린 결정이다. 최악의 결정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라는 맥닐리의 말에서는 그의 신속한 결단력을 엿볼 수 있다. 래리 엘리슨처럼 스캇 맥닐리 역시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고한 믿음, 신속한 결단, JAVA라는 미지의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도전정신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과 친화력이 더해져 지금의 스캇 맥닐리를 만든 것이라 하겠다.
 초창기 Sun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최대의 강점은 기존 산업계에서 널리 사용되는 표준을 그대로 따랐다는 점이다. 설립 후 Sun의 성공요인은 기존의 값비싼 미니컴퓨터를 대체하는 워크스테이션으로 모든 사용자들이 각각 워크스테이션을 소유하고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점, 대형 모니터를 사용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의 도입으로 사용자와 컴퓨터간의 상호작용을 단순화 시킨 점, 모든 컴퓨터를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다른 사용자들과의 공동연구가 가능하게 했다는 점, 산업 규격 부품을 사용하여 기존 시장의 워크스테이션의 절반 가격에 제품 생산이 가능했다는 점, 빌 조이의 영입을 통해 버클리 유닉스의 업그레이드 판을 사용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확실한 분야에 집중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맥닐리의 CEO 취임 이후, Sun은 다른 업체들이 개발한 표준에 의존하여 성장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표준”을 개발하는 영역으로 나아갔다. 다양한 어플리케이션의 개발을 위해 독립적 소프트웨어 업체들을 대상으로 주요 무역박람회에서 Sun의 부스를 대여해 주고 Sun의 워크스테이션에서 그들 독립 소프트웨어 업체의 프로그램을 시연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 개발업체에 다른 운영체제를 위해 개발한 어플리케이션을 Sun의 운영체제에 맞게 이식하기 위한 포팅비용을 대출해 주거나, 워크스테이션을 대여 또는 할인해 주는 등의 전략을 펼쳐 Sun의 운영체제에서 실행될 수 있는 많은 어플리케이션을 확보하였다. 여기에 더해, 그동안 산업분야에 국한되어 진출하였던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금융, 자동차 제조등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였고 금융시장은 오늘날까지도 Sun의 요새로 남아 있다.
 다양한 어플리케이션 확보와 새로운 시장 개척에 주력하던 Sun은 1984년 말 네트워크 파일 시스템 을 개발했고, 후일 Java의 확산에서도 도입된 보급 방법인 저렴한 수수료를 받고 다른 워크스테이션 업체들에게도 네트워크 파일 시스템의 소스 코드 사용을 허가해 주는 방식으로 네트워크 파일 시스템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는 업계에 새로운 표준을 제공하는 것으로 Sun이 워크스테이션 분야의 선두주자로 나서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Sun이 그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에 Sun의 워크스테이션이 타사의 워크스테이션보다 네트워크 파일 시스템 가동에 적합할 것이라는 인상을 고객들에게 심어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Sun이 늘 성장했고 성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현재 수입면에서는 비슷하지만 시장가치는 Sun의 4배 규모로 성장한 시스코가 장악하고 있는 네트워킹 시장을 Sun에서 장악할 기회를 얻었으나 당시 Sun의 주축이었던 코슬러, 맥닐리, 벡톨샤임 모두 그 점에 대해서 간과했고, 이는 나중에 코슬러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가장 멍청한 짓이 바로 시스코를 놓쳤다는 것이다. ‘네트워크가 컴퓨터다’라는 문구를 선전한 후 왜 네트워킹이 Sun이 추구하는 분야가 되지 못했을까? 가지 않은 길은 도대체 무엇일까?” 라고 후회할 일이 되었다. 또, 맥닐리의 독단이 선을 넘어 Sun에 피해를 준 일례인 데스크탑 시장 공략 같은 실패도 있었다.
 그러나 1985년 말, Sun은 Sun-3 워크스테이션의 출시를 통해 최대 경쟁사였던 아폴로를 영원히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1990년대 인터넷 시대에 들어서면서 AOL, MS, 아마존닷컴 등이 사용한 보편적인 전략인 일정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한 후 수익성을 따지는 전략을 맥닐리는 이미 구사할 줄 알았고, 이에 의해 경쟁사 아폴로는 침몰해 갔다. 10억 달러 규모로 급속도로 성장한 Sun은 두 개의 주요 기술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네트워크 파일 시스템의 제 2의 성공을 위한 것과, AT&T와 합작하여 새롭게 기능을 향상시킨 유닉스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윈도우즈를 MS의 운영체제와 동일시 하지만, 1980년대에 이미 산업용으로 개발된 많은 시스템에서 두개 이상의 정보 스크린을 볼 수 있는 윈도우즈 인터페이스는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운영체제를 제작하는 제작사들이 서로 다른 시스템을 제공하였다는데 있었다. Sun 윈도우즈는 Sun 워크스테이션에서만 가동되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일 Java 개발의 주역이 되는 제임스 고슬링이 이끄는 Sun 엔지니어팀이 네트워크 확장가능 윈도우즈 시스템(NeWS)개발에 착수하였다. 이 시스템은 소프트웨어가 있는 모든 기계들이 그 공급업체가 Sun이든 휴렛팩커드든 IBM이든 상관없이 윈도우즈를 가동할 수 있게 하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강력해진 Sun을 견제하려 하는 세력들은 디지털 이큅먼트를 주축으로 하여 X-윈도우즈를 만들었고, 그를 훨씬 뛰어넘을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던 NeWS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이 실패는 나중에 개발될 JAVA를 위해 좋은 경험이 되었다.
 이후에도 Sun은 AT&T와의 합작으로 개발한 유닉스 개발의 실패, 새로운 프로세서 스팍(SPARC)을 사용한 스팍 스테이션의 출시 과정에서의 수요예측의 판단미스로 인한 최초의 적자발생 등의 위기를 여러차례 맞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CFO 조 그라치아노와 상무이사 버니 라크루트가 회사를 떠나는 등 Sun은 점점 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CEO 스캇 맥닐리의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맥닐리는 CFO와 상무이사의 빈자리를 스스로 메꾸면서 내부의 생산관리로 눈을 돌렸다. 각 부사장들을 생산과정 감독을 위해 투입하고, 내부 비용지출의 승인을 엄격하게 집행하였다. 신규고용을 중단하고 고용인원을 자연삭감하는 등 내부정리를 단행했다. 1989년의 경험을 통해 맥닐리는 내부문제에 신경을 쓸 경우 전략 수립, 마케팅, 고객을 위한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외부적으로 뛰어나기 위해서는 내부적으로도 뛰어나야만 했고, 이 교훈을 얻기 위해 비싼 댓가를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1990년 1/4분기에 Sun은 5억 3,850만 달러의 최고 수익을 올렸고 5천 2백만 달러의 이익을 달성했다.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개발사 오라클을 대중적 인식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 네트워크 컴퓨터(NC)라면, 워크스테이션 제조사인 Sun을 대중적 인식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JAVA(자바)일 것이다. 1995년 자바를 선보이기 전까지 Sun은 실리콘 밸리와 컴퓨터 업계에서만 알려져 있었고, 1990년대의 수많은 신생업체에 비하면 오래된 기술업체일 뿐이었다. 새롭게 부상하는 웹/인터넷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브라우저 개발사 넷스케이프, 검색포탈 야후 등 수많은 신생업체들이 떠올랐고, Sun은 이에 비해 진부하기도 하고 안정적인 회사로 인식되고 있었다. 자바는 처음 개발되었을 당시에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위한 코드를 만들 수 있는 일종의 알파벳과 문법 체계에 해당하는 프로그래밍 언어였다. 그러나 베이직, C 등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에 비해 자바는 윈도우즈, 매킨토시, 솔라리스 등 기초 운영체제에 구속받지 않는 다는 확연히 다른 특성을 갖고 있었다. 맥닐리 등 일명 ‘자바의 전도사’들은 이런 호환성을 내세워 윈도우즈와 익스플로어를 통한 빌 게이츠의 독재를 해방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NeWS 프로젝트의 실패로 상처를 받은 Sun의 최고 기술자 중 한명인 패트릭 노튼은 스캇 맥닐리, 빌 조이, 존 게이지의 지원을 받아 제임스 고슬링, 마이크 쉐리던과 한 팀을 이루게 된다. 이들은 Sun Labs의 총책임자 웨인 로싱의 관할하에 ‘그린’이라는 프로젝트, NeWS 프로젝트의 실패를 만회하고도 남을만한 혁명적인 소프트웨어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성과는 1992년 9월 ‘스타7’이라는 공유메시지 기판, 무선호출,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이드, 비디오 프로그래밍 등을 포함한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가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개발과정에서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을 담당했던 제임스 고슬링은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해 ‘오크’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는 당시에는 ‘그린’프로젝트의 일부에 불과했으나 나중에 자바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Sun은 처음에 그린 프로젝트의 개발품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를 포함해 상용화하려 하였고, 이를 위해 퍼스트펄슨이라는 회사를 따로 설립하였다. 퍼스트펄슨의 가동 후 얼마 뒤, 타임워너는 대화식 텔레비전 사업을 시도하겠다고 발표하였고 이를 위해 완전서비스 네트워크(FSN)의 구현을 시도했다. 이에 퍼스트펄슨, MS, 실리콘 그래픽스가 뛰어들었는데 퍼스트펄슨은 타임워너의 요구사항에 딱 들어맞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정작 계약은 셋탑박스의 소유권을 타임워너에 주는 유리한 조건을 제안한 실리콘 그래픽스에게 돌아갔다.
 셋탑 박스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한 채 퍼스트펄슨은 점점 약해져 갔다. 해체 단계에 이르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내부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퍼스트펄슨의 내부분열 뿐만 아니라 Sun 자체적으로도 새로운 칩의 개발이 실패함으로 주가와 수익에서 바닥을 기록하는 어려운 시기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 ‘오크’를 개발한 프로그래머 제임스 고슬링은 내부분열에 회의를 느끼고 퍼스트펄슨을 떠나려 했으나, 맥닐리는 그를 설득하여 Sun으로 복귀시키고, ‘오크’를 인터넷에 접목하려는 아이디어를 진행시켰다. 각 엔지니어링 팀들은 서로 경쟁적인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했고, 오크는 인터넷을 포함해 보다 많은 영역에서 폭넓게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들을 제치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오크’라는 이름이 상표권상의 문제가 있다는 변호사의 지적에 따라, 새로운 명칭에 대한 협의 끝에 ‘자바’라는 이름이 선택되었다.
 나중에 Sun을 떠나 ‘마림바’라는 인터넷 회사를 창립하는 킴 폴레세는 자바의 마케팅 담당자였는데, 대대적인 광고 역사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기록된 폴레세의 자바를 위한 판촉활동 후 자바는 넷스케이프의 차기 출시 버전에 사용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차후 맥닐리 등과 함께 ‘자바의 전도사’ 중 한명으로 인정받는 기술평론가 조지 길더는 “자바 또는 이와 유사한 언어가 널리 보급되면 소프트웨어는 진정한 의미로 개방된다”라면서 넷스케이프의 네비게이터와 Sun의 자바가 MS, 인텔의 퍼스널 컴퓨터 시장에서의 헤게모니를 뒤집을 수 있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Sun은 자바 기술을 판매하고 상용화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킴 폴레세는 “자바가 없었다면 Sun은 그저 서버와 워크스테이션 공급업체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그동안 Sun이 해왔던 기업체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고성능의 솔라리스 애플리케이션 개발과는 달리 일반 사용자들을 위한 재미있고, 쉽고, 인터넷이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개념의 애플리케이션 개발이었기 때문에 Sun에 있어서는 상당히 난해한 문제였다. Sun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바를 오픈 시스템으로 만들어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게 자바의 자세한 사용을 제공하고 이들이 자바를 사용하고 주문에 맞춰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것은 MS가 윈도우즈에 있어서 한번도 시도한 적이 없는 새로운 전략이었다. 그리고 어떤 운영체제에서도 실행이 가능한 개방적이고 보편적인 프로그래밍 언어, 'Java' 는 1994년 전 불과 25명에 지나지않은, 그나마도 모두 Sun 직원이었던 자바 프로그래머 숫자가 1995년 봄에는 수십만 명으로 늘어나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다.


 2003년 대학교 수업 대체리포트로 썼던 내용인데, 그때는 쓰면서도 이게 뭔소린지, Java가 뭔지 알지도 못하고 내용 요약성 독후감으로 냈었다. 네이버 블로그에는 5개의 단락으로 쪼개 올렸는데 그냥 이렇게 하나로 쭉 봐도 나쁘지는 않을것 같아 역사잡설란에 옮긴다. 그래서 제목도 저렇게 썼고. 2003년 당시, 참고자료 기준으로는 2001~2002년 쯤인거 같은데 그 시점에서의 상황이고, 처음 작성은 스캇 맥닐리의 성공적인 이미지 - 현 시점에서는 성공인거 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한데 - 에 초점을 맞춰 쓴 글이니 평가가 다소 긍정적이라 하더라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지금 내가 Java를 하게 될줄 그땐 정말 상상도 못했다. 아, 그런데 시작에 Java 로고 이미지 썼다고 엘리슨이 나 고소미 먹이는거 아닌가 몰라. 엘리슨과 오라클 관련 글도 생각나면 옮겨와야겠다. 보다보니 말이 좀 어색한데도 있고 해서 내용 수정은 아니지만 일부 수정, 가필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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