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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雜說/동양

흉노(匈奴)와 전한(前漢)

Dohwasa 2008. 7. 2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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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4세기 경에 등장한 흉노는 등장 후부터 중국 왕조들에게는 북방의 가장 강력한 위협으로 존재하였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는 장군 몽염(蒙恬)에데 30만 대군을 주어 황하(黃河) 이남까지 진출한 흉노를 내쫓고 이어 전국시대 때 수축된 북방의 장성들을 모두 이어 만리장성을 수축하게 하였다. 진한 교체기에 위대한 지도자 묵특선우(冒頓單于)의 지도하에 세력을 회복한 흉노는 동쪽의 동호(東胡), 서쪽의 월지를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흥안령에서 서쪽으로는 톈산(天山)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중국을 통일한 한의 고조 유방은 대군을 이끌고 산서성에 침입한 묵특선우의 흉노군을 32만의 대병을 소집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만 오히려 대동(大同)에서 흉노의 군세에 포위당하는 치욕을 당해야 했고, 이 후 한의 대 흉노정책은 강경노선에서 화친정책으로 변경되어 공주를 선우의 비인 알지(閼氏)로 보내고 막대한 양의 조공을  흉노에게 바치게 되었다.

 한 고조의 치욕 이 후, 안정된 재정과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한 무제는 그간의 대 흉노정책을 강경책으로 변경하였다. B.C.133년 군신선우(軍臣單于)를 마읍(馬邑)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이 후 매년 북방을 침입하는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기마병을 육성하여 B.C.129년 관문전투를 시작으로 7회에 걸친 대 흉노전을 수행하게 된다.

 B.C.129년의 관문전투 때 출정한 장군 중 유일하게 공을 세운 위황후의 동생 위청은 이 후 무제의 흉노 공략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3차 출정 때는 오르도스 지방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이 지역에 삭방(朔方)군을 설치하였다.
 B.C.123년에는 서역에서 돌아온 장건의 길 안내에 도움을 받아 위청이 대공을 세우고, 이후 무제에 의해 위청과 더불어 대 흉노전에 중용되는 위청의 생질인 젊은 장군 곽거병은 이 때 표요교위로 참전하여 이름을 알렸다.
 B.C.121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대장군(大將軍) 위청 다음가는 지위에 오른 곽거병은 현재 감숙성 일대에 위치한 흉노 세력을 공격하여 거연해와 기련산 일대까지 평정하는 공을 세우고, 이에 위협을 느낀 흉노의 혼야왕(混邪王)은 한에 투항하자는 설득에 응하지 않는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그 일가를 포로로 잡아 한에 투항하여 흉노의 서쪽 세력이 크게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내부 분열까지 발생하고 여러해에 걸친 가뭄에 의해 말에게 먹일 양초가 부족해져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흉노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B.C.119년 위청과 곽거병은 산서에서 두 갈래로 길을 나눠 출격하여 외몽골 지역까지 진격하여 흉노의 남부 근거지를 제압했고, 흉노의 선우는 고비사막을 넘어 북방으로 후퇴하면서 무제의 대 흉노전은 일단 한의 승리로 마무리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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