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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장군 부여윤충(扶餘允忠) 본문

歷史雜說/동양

백제 장군 부여윤충(扶餘允忠)

Dohwasa 2008. 6. 2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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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때의 장군으로, 백제 상좌평 성충(부여성충, 扶餘成忠)의 동생이다.

642년(의자왕 2)에 의자왕(義慈王)이 정예병 수만으로
대야주(大耶州)의
미후성을 포위했을 때, 1만 군사로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다.

당시 대야주는 신라 서부의 큰 고을로, 관할하는 성읍이 40여개에 이르렀다.
대야성주는 김품석(金品釋)으로,
후의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였다.
김춘추는 딸 소낭(炤娘)을 아껴 대야성에 속한 고타현(古陀縣)을 식읍으로 주어
고타소낭(古陀炤娘)이라 부르고, 사위 김품석을 대야주 도독으로 삼았다.

그러나 김품석은 장인의 권세를 믿고 부하와 백성들을 학대하고 음탕과 사치를 일삼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부하인 검일(黔日)의 처의 미모가 뛰어난 것을 탐하여 그 처마저 빼앗으니,
검일이 이를 분하게 여겨 복수를 다짐하던 차에,
백제군이 미후성을 포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내응할것을 약속하였다.

의자왕은 윤충에게 정예병 1만을 딸려 대야성을 치도록 명하였고,
내응하기로 한 검일은 성 안의 창고에 불을 놓아 군량을 모두 태워버렸다.
결국 대야성의 신라군은 성내의 민심이 흉흉해져 싸울 의지를 잃고 말았다.

김품석은 부하 서천(西川)을 시켜 성 위로 올라가서 윤충에게 항복할 뜻을 전하도록 하였다.
품석의 항복 의사를 전해받은 윤충은 좌우의 사람들에게
"저희 부처를 위하여 국토와 인민을 파는 놈을 어찌 살려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허락하지 않으면 성 안에서 버티고 앉아 얼마동안이나 더 싸울지 모르니,
차라리 거짓으로 허락하고 사로잡는것이 옳다." 라고 하였다.

윤충은 서천에게 대답하기를,

"저 하늘의 해를 두고 맹세컨대, 공의 부처의 살아 돌아감을 허락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렇게 대답하는 한편, 복병을 두고 거짓으로 물러나니,
품석이 먼저 그 부하들을 성밖으로 내보냈다.
미리 매복해 있던
 백제의 복병들에 의해 품석의 부하들이 격살당하고
품석 부처는 성 내의 검일에게 몰려 죽었다.

의자왕은 미후성에서 직접 대야성으로 와서 윤충의 작위를 높이고,
말 20필과 미곡 1천섬을 상으로 주고, 그 부하 장수들에게도 차례로 상을 내려 표창하였다.

당 태종(唐 太宗)의 고구려(高句麗) 침공 때 신라는 13만 대병을 일으켜
고구려의 남방을 어지럽혀 당 태종의 군세에 호응하였고,
의자왕은 이 틈을 노려 계백(階伯)을 시켜 성열(省熱) 등 신라의 7개 성을 빼앗고,
윤충을 보내어 부사달(夫斯達, 지금의 개성)을 비롯한 10여개 성을 점령하게 한 다음,
이어 해군을 이끌고 당의 강남(江南) 일대를 공격하도록 하여
월주(越州) 등지를 점령,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월주를 공격하여 빼앗은 윤충은 의자왕의 명에 따라
진(鎭)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조련하여 당의 강남지역을 공략할 준비를 하였으나,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의 사주를 받은
간신(奸臣) 임자(任子)가
성충, 윤충 형제를 모함하였다.
의자왕은 이를 믿어 윤충을 파직, 소환하고 성충을 멀리하였다.

윤충이 소환된 후 얼마 지나지않아 월주는 당군의 공격에 함락되었고,
이에 윤충은 걱정과 울분으로 인하여 분사하고 말았다.


- 단재 신채호 저, 조선상고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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